영화 엑시트 리뷰 줄거리 평점 출연진 및 이상근 감독의 재난 미학과 현대적 서바이벌 분석

942만 명입니다. 2019년 여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인 감독의 첫 번째 영화가 만들어낸 숫자입니다. 솔직히 저도 처음엔 기대를 크게 안 했습니다. 조정석이 빌딩 벽을 타고 올라간다는 설정이 좀 억지스러울 것 같았거든요. 근데 막상 엑시트를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습니다. 가스가 퍼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손에 땀이 났고, 옆사람 신경 쓰일 만큼 몸이 앞으로 쏠렸습니다. 2019년 7월 31일 개봉한 이 영화가 개봉 3일 만에 100만, 36일 만에 900만을 넘긴 이유를 보고 나서야 이해했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특별한 점은 재난 영화인데 신파가 없다는 겁니다. 보통 재난 영화라고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잖아요. 엑시트는 달랐습니다. 웃기다가 쫄리고, 쫄리다가 또 웃겼습니다. 103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고,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엑시트 줄거리: 옥상 문 너머로 달리는 청춘의 가장 뜨거운 탈출극
대학 산악부 에이스 출신 이용남(조정석)은 졸업 후 몇 년째 취업에 실패한 백수입니다. 어머니 칠순 잔치에서 온 가족한테 눈치를 받으며 앉아 있는 그 장면이 너무 현실적이었습니다. 나도 저런 자리에서 저런 표정 지어본 것 같아서 첫 장면부터 웃음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정체불명의 유독가스가 도심을 덮칩니다. 가스는 무겁습니다. 아래로 깔립니다. 살려면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연회장 부점장으로 일하는 동아리 후배 의주(임윤아)와 어색하게 재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두 사람은 맨손으로 빌딩 외벽을 타기 시작합니다. 쓰레기봉투로 방호복을 만들고, 분필 가루를 손에 묻히고, 네온사인 간판과 장식물이 붙은 건물 벽을 가로지릅니다. 황당한데 왜 설득이 되냐면 두 사람이 너무 필사적이기 때문입니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게 화면에서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구조 헬기를 양보하는 순간입니다. 겨우겨우 헬기가 왔는데 용남이 뒤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태우고 자기들은 다시 안개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 순간 극장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뭔가 뭉클하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습니다. 몇 년째 루저 취급 받던 사람이 위기 순간에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게요. 이 장면 하나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출연진 분석: 조정석의 짠내와 임윤아의 예상 밖 발군
조정석은 이 영화에서 진짜 잘했습니다. 집에서 눈칫밥 먹는 백수 장면들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웃겼는데, 벽을 타기 시작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 전환이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원래 이 사람 안에 있던 것들이 비로소 터져 나오는 느낌입니다. 조정석 특유의 코믹 타이밍이 긴박한 장면 사이사이에 들어오는데, 숨을 좀 쉬게 해준달까요. 그 리듬 덕분에 103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로 조정석은 자신의 전 출연작 최고 흥행기록인 관상 913만을 넘겼습니다. 이후 파일럿, 행복의 나라로 이어지는 전성기가 엑시트에서 시작됐다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임윤아가 진짜 놀라웠습니다. 아이돌 이미지가 있으니까 예쁘게 서 있는 장면들만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액션의 80%를 대역 없이 직접 소화했다고 합니다. 화면에서 보면 압니다. 달리는 장면에서 숨이 차 보입니다. 꾸며진 표정이 아닙니다. 진짜 힘든 표정입니다. 씨네21이 거침없이 뛰고 구르는 임윤아가 발군이라고 평했는데 그 말이 정확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임윤아를 다시 봤습니다.
고두심과 박인환의 부모님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건물 안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장면들이요. 바깥에서 뛰는 용남 장면과 교차될 때마다 가슴이 조였습니다. 엄마 입장에서 보니까 그 장면들이 더 크게 와닿더라고요.
이상근 감독의 재난 미학: 평범한 손이 사람을 살리는 방식
이상근 감독이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이유를 꼽자면 주인공을 특별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용남은 클라이밍을 좀 할 뿐입니다. 특수 요원도 천재도 아닙니다. 나도 산악부 출신이었으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 것 같은 느낌. 재난 영화에서 그 공감이 생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독이 촬영에서 극도로 신경 쓴 부분이 있습니다. 재난 장면에서 아이들의 절박한 표정을 바스트숏으로 담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이후 재난 속 아이들 장면을 어떻게 찍느냐는 한국 영화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입니다. 감독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용남과 의주의 시점숏으로만 처리했고, 그 절제가 오히려 더 아프게 전달됐습니다. 자극적으로 갈 수 있는 장면에서 멈추는 것, 그게 이 감독이 신인임에도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한국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도 이 영화의 강점입니다. 대가족 칠순 잔치, 네온사인 간판, 거대한 장식물이 붙은 건물 외벽. 이 배경들이 재난 상황과 만났을 때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이 생깁니다. 외국 재난 영화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 질감입니다. 그게 이 영화를 한국 영화로만 가능한 재난 코미디로 만들었습니다.
엑시트 평점 및 총평
평점은 5점 만점에 4.8점입니다.
이 점수가 선뜻 나왔습니다. 보는 내내 지루한 순간이 없었고, 웃기고 긴장되고 뭉클한 감정이 고루 왔습니다. 4.8점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조 헬기 양보 장면 하나가 이 영화 전체의 무게를 결정합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용남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연출입니다. 임윤아가 액션 80%를 직접 소화한 것, 그리고 조정석의 코믹 타이밍이 긴박함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살린 것. 이 세 가지가 이 영화를 단순한 재난 오락물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0.2점을 뺀 이유도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악당의 동기가 너무 허술합니다. 왜 유독가스를 뿌렸는지가 제대로 설명이 안 됩니다. 재난 자체에 집중한 선택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찜찜했습니다. 후반부에 빌딩에서 빌딩으로 이동하는 패턴이 비슷하게 반복되면서 세 번째쯤 되니까 첫 번째 탈출 장면의 긴장감이 희석됩니다. 그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누구한테 권하냐면, 가족이랑 같이 볼 영화 찾을 때 가장 먼저 꺼낼 영화입니다. 12세 이상 관람가인데 자극적인 폭력이 없고 웃음도 있어서 아이들이랑 보기 딱 좋습니다. 아이들이 용남 보면서 클라이밍 배우고 싶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취업 준비 중이거나 지금 뭔가 막혀 있는 느낌인 분들에게는 용남 캐릭터가 더 가깝게 느껴질 겁니다. 반면 촘촘한 스릴러나 강한 악당 서사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조금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심오하지 않습니다. 시원합니다. 가능하면 큰 화면에서 보세요. 빌딩 외벽 장면들은 화면이 클수록 훨씬 쫄립니다.
보고 나서 한참 손바닥을 봤습니다. 분필 가루 묻힌 평범한 손이 그날 사람을 살렸다는 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우리한테도 저 손 같은 게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