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 보고 나서 삐삐가 생각났습니다. 1010235. 열렬히 사랑해. 저도 그 숫자 썼던 세대거든요. 공중전화박스에서 동전 넣고 전화하던 기억, 비디오 가게에서 테이프 빌려오던 기억. 화면에 나올 때마다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20세기 소녀는 2022년 10월 21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입니다. 방우리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고, 부산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리미어 섹션에 초청됐고, 백상예술대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지금은 선재 업고 튀어로 전국구 스타가 된 변우석이 이 영화에서 풍운호였습니다. 그때 이 영화를 보고 이미 알아봤던 분들이 나중에 많이 뿌듯해했을 것 같습니다.
1999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서 제 나이대 분들에게는 특히 더 와닿는 영화입니다. 그 시절을 모르는 분들도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는데, 그 시절을 아는 분들은 배경 하나하나에서 멈추게 됩니다. 그 차이가 이 영화를 세대별로 다르게 경험하게 만듭니다.
20세기 소녀 줄거리: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기억, 1999년의 여름이 말을 걸다
보라(김유정)의 단짝 연두(노윤서)가 심장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야 합니다. 가기 전에 부탁을 하나 남깁니다. 청주우암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백현진(박정우)이라는 남학생을 짝사랑하게 됐는데, 그 남자에 대해 모든 걸 알아내서 이메일로 보고해 달라는 것입니다. 보라는 절친을 위해 기꺼이 큐피드를 자처합니다.
그런데 백현진을 알아내려고 공중전화를 돌리다가 백현진의 친구 풍운호(변우석)에게 들키고 맙니다. 거래가 성립됩니다. 비디오 가게를 하는 보라에게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정사를 보여주면 백현진의 연락처를 알려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라와 운호가 가까워집니다.
타인을 위한 관찰이 어느 순간 자신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사랑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운호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 이혼 후 웃을 일이 없던 소년이 보라를 만나면서 달라집니다. 그렇게 둘 사이에 감정이 쌓입니다.
그리고 결말이 있습니다. 쓰기 조심스럽지만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세요. 성인이 된 보라에게 어느 겨울 소포가 도착합니다. 고등학교 때 운호에게 빌려줬던 비디오테이프입니다. 재생하면 그 안에 운호가 찍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전시회 티켓이 함께 들어 있는데, 전시회에 가보니 故 풍운호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운호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방우리 감독이 변우석 배우에게도 사망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부분이 오히려 더 먹먹합니다.
출연진 분석: 김유정의 보라, 변우석의 운호
방우리 감독이 시나리오 쓸 때부터 김유정을 원픽으로 염두에 뒀다고 했습니다. 보라라는 캐릭터를 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김유정이 가진 이미지가 녹아들어 갔다고. 보고 나면 그 말이 이해됩니다. 보라는 에너지가 넘치고 친구를 위해 뭐든 하는 소녀인데, 그 캐릭터가 김유정 자체처럼 느껴집니다. 복도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비디오테이프를 높이 치켜들고 벌을 서는 장면이 특히 웃겼는데 그 에너지가 김유정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변우석의 풍운호는 선재 업고 튀어의 류선재보다 먼저 나온 첫사랑 캐릭터입니다. 말수가 적고 어두운 배경을 가졌는데 보라를 만나면서 변하는 소년. 보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잘 기억납니다. 티가 안 나는데 계속 티가 나는 그 눈빛. 변우석이 이 영화에서 이미 그 감각을 보여줬는데 당시엔 덜 알려졌던 거라 지금 보면 더 반갑습니다. 노윤서는 연두라는 역할이 많이 나오지 않지만 중요한 위치입니다.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따냈다고 하는데 왜 선택됐는지 보면 압니다. 청설에서의 노윤서와 이 영화의 노윤서가 같은 배우라는 게 또 새롭습니다.
방우리 감독의 레트로 미학 분석: 1999년을 왜 선택했는가
이 감독이 1999년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입니다. 뭔가가 끝나기 직전의 시간입니다. 첫사랑도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끝납니다. 그 시간의 공통점이 이 영화의 정서를 만들었습니다. 오렌지빛 색감, 삐삐, 공중전화, 비디오 가게, 교환일기. 이 소품들이 단순한 복고 장식이 아닙니다. 그 시절에는 소식이 닿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의 무게가 이 영화의 감성을 만드는 핵심입니다.
감독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죽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첫사랑과 이루어지지 못한 아련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운호를 죽게 했다고. 그 선택이 영화를 달콤한 첫사랑 영화에서 끝내지 않고 오래 기억되는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결말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데, 운호의 죽음이 갑작스럽다는 혹평도 있고 그래서 더 아프다는 호평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였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후반부 전개 속도가 급격히 빨라집니다. 운호의 죽음이 충분히 소화되기 전에 장면이 넘어갑니다. 그 부분이 더 여유 있게 처리됐다면 울음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빠르게 지나가서 감정이 따라가기 버거웠습니다.
20세기 소녀 평점 및 총평
평점은 5점 만점에 4.7점입니다.
이 점수를 정하면서 생각한 건 이겁니다. 보고 나서 며칠 뒤에 갑자기 생각나는 영화인가. 그렇습니다. 삐삐 숫자가 생각나고, 비디오 가게 형광등 불빛이 생각나고, 풍운호가 보라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생각납니다. 그런 영화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4.7점에서 0.3점을 뺀 이유는 후반부 속도감 때문입니다. 앞부분의 설렘과 감정이 잘 쌓이다가 운호의 죽음 이후 결말까지 가는 호흡이 너무 빠릅니다. 감정을 충분히 소화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 부분이 조금만 더 여유로웠다면 4.9점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한테 권하냐면, 일단 1990년대를 10대로 보낸 분들에게 강력히 권합니다. 화면 속 소품 하나하나에서 멈추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 시절을 모르는 분들도 괜찮습니다. 첫사랑 이야기는 세대를 타지 않습니다. 변우석 팬이라면 선재 업고 튀어 전에 이 영화를 보시면 더 반갑습니다. 풍운호가 먼저였으니까요. 결말이 무거운 편이라 가벼운 로맨스를 원하는 분들은 그 점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넷플릭스에 있습니다.
보고 나서 한참 삐삐 숫자들이 생각났습니다. 1010235, 8282, 1004. 그때는 그 숫자들로 마음을 전했습니다. 지금처럼 카톡으로 바로 보낼 수 없었으니까요. 그 불편함이 오히려 더 뜨거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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